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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파누프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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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제이 파누프니크는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바르샤바, 파리, 빈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바르샤바에 머물며 활동했다. 전후에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작품 발표 금지 조치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하여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1991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런던에서 사망했다. 파누프니크는 10곡의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성악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카틴의 희생자를 위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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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파누프니크
기본 정보
안제이 파누프니크, 1990년대 초반
파누프니크, 1990년대 초반
직업작곡가, 지휘자
출생일1914년 9월 24일
출생지바르샤바
사망일1991년 10월 27일
사망지트위크넘, 런던
이름
폴란드어Andrzej Panufnik ()

2. 생애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파누프니크는 1932년부터 1936년까지 바르샤바, 파리, 의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빈에서는 일본인 음악가 오타카 나오타카와 교류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바르샤바에 머물며 콘서트를 열거나, 카페에서 비토르트 루토스와프스키와 함께 피아노 연탄을 했다. 루토스와프스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도 이 시기에 연주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대부분의 작품을 잃었고, 종전 후 일부를 기억에 의존해 복원했다.

전후에는 바르샤바와 크라쿠프의 교향악단에서 활동했고, 여러 나라에서도 활동했다.

1954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그의 작품 출판과 연주를 금지하자(1977년까지 유효), 영국으로 망명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1991년 나이트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런던트위크넘에서 사망했다.

2. 1. 아동기 및 학업

파누프니크는 바르샤바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와 아마추어 바이올린 제작자였지만 명성이 자자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음악에 대한 흥미와 항공기 기계에 대한 매력 사이에서 갈등했다. 할머니는 그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었지만, 재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부는 불규칙했다. 학생 시절 그는 몇몇 성공적인 대중가요를 작곡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마음을 풀었고, 그가 대학에 진학하는 조건으로 음악을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 파누프니크는 바르샤바 음악원의 피아노 입학 시험을 치르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타악기 학생으로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 타악기 수업을 떠나 작곡과 지휘 공부에 집중했으며, 열심히 공부하여 정규 과정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과정을 마쳤다.

1936년 우등으로 졸업한 후, 으로 가서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 1년간 지휘를 배울 계획이었지만, 징병제로 인해 연기되었다. 파누프니크는 신체검사 전날 밤, 폴란드 중세 찬가인 ''보고로드지차''를 라디오에서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이 찬가에 완전히 매료되어 밤늦도록 깨어 검은 커피를 연거푸 마셨다. 그 결과 그는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군 복무를 면제받았다. 대신 그는 이 1년의 공백을 이용하여 영화 음악을 작곡하여 돈과 명성을 쌓았다.

1937년 파누프니크는 바인가르트너에게 배우기 위해 빈으로 갔다. 그는 또한 제2 빈 악파 작곡가들의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했지만,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작곡에 예술적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제약을 가한 것에 찬사를 보낸 반면, 12음 기법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파누프니크는 계획했던 1년 간의 체류를 마치기 전에 폴란드로 돌아왔으며, 안슐루스 직후 바인가르트너가 아카데미에서 해임되면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곧 떠났다.

파누프니크는 또한 파리런던에서 몇 달 동안 살면서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는 런던에서 바인가르트너를 다시 만났고, 나이 많은 지휘자는 악화되는 국제 정세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영국에 머물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파누프니크는 폴란드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2. 2. 전쟁 기간

제2차 세계 대전 중 바르샤바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파누프니크는 친구이자 동료 작곡가인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와 피아노 듀오를 결성하여 바르샤바의 카페에서 공연했다. 이는 폴란드인들이 합법적으로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점령군이 조직적인 모임을 금지했기 때문에 콘서트를 주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파누프니크는 또한 불법적인 '지하 저항 노래'를 작곡했는데, 특히 "바르샤바의 아이들"은 저항적인 폴란드 사회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시기에 그는 '비극 서곡'과 두 번째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후 파누프니크는 몇 차례 자선 콘서트를 지휘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한 콘서트에서 그의 '비극 서곡'이 초연되었다. 그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직전에 병든 어머니와 함께 바르샤바를 탈출하면서 자신의 아파트에 모든 악보를 남겨두었다. 1945년 봄, 파누프니크는 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의 악보를 되찾기 위해 도시의 폐허로 돌아왔지만, 광범위한 파괴 속에서도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악보가 그의 방을 차지한 낯선 사람에 의해 불길에 던져졌다는 것을 발견했다.[13]

2. 3.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파누프니크는 크라쿠프로 이주하여 육군 영화 부대의 영화 음악 작곡가로 일했다. 이 시기 그는 크라쿠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맡으며, 잃어버린 작품들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작품을 작곡했다. 현악 오케스트라와 두 대의 하프를 위한 ''자장가''는 템스강과 밤하늘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으며, 4분의 1 음을 사용하여 폴란드 음악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3]

폴란드 작곡가 연합(ZKP)의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파누프니크는 음악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의 회의에 자주 참석해야 했다. 그는 코다이 졸탄, 앨런 부시, 벤자민 프랭클 등 다양한 배경의 작곡가들을 만났다.

전후 폴란드 정부는 예술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고, 즈다노프 포고령의 영향으로 작곡가들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을 따라야 했다. 파누프니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모기와 같아서, 모든 사람이 그것이 찌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본 적이 없다"는 폴란드 농담을 인용하며 비판했다. 그는 역사적인 폴란드 음악을 기반으로 한 ''옛 폴란드 모음곡''을 작곡하여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그의 ''야상곡''은 비판을 받았고, ''소박한 신포니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국립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폴란드에서 산발적으로 공연되었다. 파누프니크는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 해외에서 홍보되었고, 노동 훈장 1등급을 받았다.

1950년, 파누프니크는 소련 교육 방식을 연구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과 교류했다. 그는 ''평화의 교향곡''을 작곡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그의 친구 야로스와프 이바슈케비치의 가사로 작품을 완성했지만, 당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간질을 앓고 있던 아일랜드 여성 마리 엘리자베스 오마호니("스칼렛")와 결혼하여 딸 오나를 낳았지만, 오나는 스칼렛의 발작 중 익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파누프니크는 영화 음악 작곡에 몰두하며 ''고대 방식의 협주곡''을 개작했고, ''영웅적 서곡''으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전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국내에서는 "형식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1953년, 파누프니크는 중국 순회 공연 중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오 주석을 만났다. 그는 폴란드 "평화 운동"에 대한 서방 음악가들의 지지를 타진하는 편지를 쓰라는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를 첩보 활동 강요로 간주하여 1954년 영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파누프니크의 탈출은 존 르 카레 소설과 같이 극적이었다. "스칼렛"의 도움으로 스위스에서 지휘 활동을 꾸몄고, 취리히에서 폴란드 공안부 요원들을 따돌리고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하여 정치적 망명을 허가받았다. 그의 망명은 국제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폴란드 정부는 그를 반역자로 낙인찍고 그의 음악과 지휘 기록을 억압했다. 파누프니크는 1977년까지 비인간으로 취급되었다.

2. 4. 영국 망명과 이후의 삶

1954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파누프니크의 작품 출판과 연주를 금지하자, 그는 폴란드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4] 망명 후, 그는 가끔 지휘를 하여 얻는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랄프 본 윌리엄스와 아서 벤자민을 포함한 동료 작곡가들이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었다. 파누프니크는 동료 음악가들의 연대에 감동받았다. 그의 오랜 친구인 피아니스트 비톨트 마우치친스키도 부유한 후원자를 찾아주며 그를 도왔다.[4]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재정 상황이 다소 나아졌다. 그러나 연간 50회의 콘서트를 준비하는 것은 그가 작곡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방해했다.

1961년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다.[15] 1963년 11월, 그는 카밀라 제셀과 결혼하여 그레이터런던 트위크넘템스강 근처 집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평화를 얻었다.[16]

그의 작품은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오자와 세이지, 앙드레 프레빈, 게오르그 솔티 경과 같은 주요 음악가들과 예후디 메뉴힌(바이올린 협주곡 위촉),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첼로 협주곡 위촉)에게 요청받았다.[16] 그는 또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3번, 보스턴시카고에서 각각 100주년 기념 교향곡을 의뢰받았다. 왕립 필하모닉 협회는 그의 아홉 번째 교향곡을 의뢰했다.[16]

파누프니크는 1990년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폴란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1991년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16] 그는 77세의 나이로 트위크넘에서 사망하여 리치몬드 묘지에 묻혔다.[16] 그의 두 번째 부인 카밀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록산나(1968년 ~ ) 또한 작곡가이다.[15]

3. 작품

1944년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파누프니크의 초기 작품 다수가 유실되었으나, 1945년에 일부를 재구성했다.

파누프니크는 10곡의 교향곡(바르샤바 봉기로 소실된 2곡 제외) 외에도 현악 사중주곡(3곡)과 협주곡(바이올린, 피아노 등)을 작곡했다.

카틴 학살 희생자를 위한 「카틴의 희생자를 위해」는 파시즘에 대한 경종으로 쓰였으나, 후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한 소련의 범행으로 밝혀졌다.[13]

3. 1. 관현악곡

파누프니크는 10개의 교향곡 외에도 다양한 관현악곡을 작곡했다. 1939년 작곡된 교향곡 1번과 1941년 작곡된 교향곡 2번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실되었다.[14] 이후 1948년 'Sinfonia Rustica'를 교향곡 1번으로, 1957년 'Sinfonia Elegiaca'를 교향곡 2번으로 발표했다. 대표적인 교향곡으로는 Sinfonia Sacra(교향곡 제3번, 1963), 'Sinfonia di Sfere'(교향곡 제5번, 1974–1975), 'Sinfonia Votiva'(교향곡 제8번, 1981, 1984년 개정), 교향곡 제9번 'Sinfonia di Speranza'(희망의 교향곡, 1986, 1990년 개정), 교향곡 제10번 (1988, 1990년 개정) 등이 있다.

다음은 파누프니크의 주요 관현악 작품 목록이다.

  • 'Tragic Overture'(비극적 서곡) (1942, 1944년 소실, 1945년 재구성, 1955년 개정)[14]
  • 'Lullaby'(자장가) (1947, 1955년 개정)
  • 'Nocturne'(야상곡) (1947, 1955년 개정)
  • 'Old Polish Suite'(옛 폴란드 모음곡) (1950, 1955년 개정)[14]
  • 'Heroic Overture'(영웅적 서곡) (1952, 1969년 개정)
  • 'Rhapsody'(랩소디) (1956)
  • 'Polonia'(폴로니아) (1959)
  • 'Autumn Music'(가을 음악) (1962, 1965년 개정)
  • 'Landscape'(풍경) (1962, 1965년 개정)
  • 'Katyń Epitaph'(카틴 묘비명) (1967, 1969년 개정)[14][13]
  • 'Concerto Festivo'(축제 협주곡) (1979)
  • 'Arbor Cosmica'(우주수) (1983)
  • 'Harmony'(조화) (1989)


특히 '카틴 묘비명'은 카틴 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되었는데, 당시에는 나치의 범행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소련의 범행이었음이 밝혀졌다.[13]

3. 2. 협주곡


  • 독주 트럼펫, 하프 2대, 하프시코드,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Concerto in modo antico영어'' [원제: Koncert Gotyckipl, "고딕 협주곡"] (초기 폴란드 작품을 기반으로 함, 1951년, 1955년 개정)[1]
  • 피아노 협주곡 (1962년, 1970년 개정, 1972년 재작곡, 1982년 제1악장 ''Intrada영어'' 추가)[1]
  • 플루트와 소규모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Hommage à Chopin영어'' (1949년 성악 작품을 1966년 편곡)[1]
  • 바이올린 협주곡 (1971)[1]
  • 팀파니, 타악기,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 (1979–80)[1]
  • 바순 협주곡 (1985)[1]
  • 첼로 협주곡 (1991)[1]

3. 3. 실내악곡


  • 피아노 삼중주 (1934, 1944년 소실, 1945년 재구성, 1977년 개정)
  •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바순을 위한 ''아카데미코 5중주''(Quintetto Accademico) (1953, 1956년 개정, 소실, 1994년 재발견)
  • 플루트 3대와 첼로 3대를 위한 ''트라이앵글''(Triangles) (1972)
  • 현악 사중주 1번 (1976)
  • 현악 사중주 2번 ''메시지''(Messages) (1980)
  • 현악 육중주를 위한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노래''(Song to the Virgin Mary) (1964년 성악 작품을 1987년 편곡)
  • 현악 육중주 ''사고의 기차''(Train of Thoughts) (1987)
  • 현악 사중주 3번 ''위치난키''(Wycinanki, "오려내기") (1990)
  • 현악 사중주를 위한 ''고전 모음곡'' (1933, 1944년 소실)


파누프니크는 현악 사중주곡 3곡을 작곡했다.

3. 4. 성악곡


  • Psalmy|시편pl - 독창, 합창, 오케스트라 (1936, 파누프니크의 졸업 작품, 1944년 분실)[1]
  • 다섯 개의 폴란드 농민 노래 - 소프라노 또는 고음부, 플루트 2개, 클라리넷 2개, 바순 (1940, 1944년 분실, 1945년 재구성, 익명의 폴란드어 텍스트)[1]
  • 네 개의 지하 저항 노래 - 성악 또는 유니슨, 피아노 (1943–44, 스타니스와프 리샤르트 도브로볼스키의 폴란드어 텍스트)[1]
  • Hommage à Chopin|쇼팽에게 바치는 찬가pl - 소프라노와 피아노를 위한 보칼리제, 원래 제목은 Suita polska|폴란드 모음곡pl (1949, 1955년 개정)[1]
  • Symfonia Pokoju|평화의 교향곡pl - 합창과 오케스트라 (1951, 이후 철회되어 작곡가의 교향곡 목록에 포함되지 않음, 야로스와프 이바슈키에비츠의 폴란드어 텍스트 설정)[1]
  • Song to the Virgin Mary|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노래영어 - 무반주 합창 또는 6명의 독창 (1964, 1969년 개정, 익명의 라틴어 텍스트)[1]
  • Universal Prayer|보편적 기도영어 -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독창자, 합창, 하프 3대, 오르간 (1968–69, 알렉산더 포프의 영어 텍스트 설정)[1]
  • Invocation for Peace|평화를 위한 간구영어 - 고음부, 트럼펫 2대, 트롬본 2대 (1972)[1]
  • Winter Solstice|동지영어 - 소프라노와 바리톤 독창자, 합창, 트럼펫 3대, 트롬본 3대, 팀파니, 글로켄슈필 (1972, 카밀라 제셀의 영어 텍스트)[1]
  • Love Song|러브 송영어 - 메조소프라노와 하프 또는 피아노 (1976, 1991년 선택적 현악 오케스트라 파트 추가, 필립 시드니의 영어 텍스트 설정)[1]
  • Dreamscape|몽환영어 - 메조소프라노와 피아노 (1977, 무언가)[1]
  • Prayer to the Virgin Mary of Skempe|쉠페의 성모에게 바치는 기도영어 - 독창 또는 유니슨 합창, 오르간 및 기악 앙상블 (1990, 예지 페테르키에비츠의 폴란드어 텍스트 설정)[1]

4. 유산

파누프니크는 사후 폴란드로부터 폴란드 재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가 사망한 후 경 게오르크 솔티는 "그는 중요한 작곡가이자 일류 지휘자였으며, 유럽 음악 전통의 최고 주창자였다."라고 썼다.[7]

리버사이드 하우스, 트위크넘의 명판


2014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축하 콘서트와 행사가 열렸다. 주요 행사로는 2월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파누프니크와 특히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두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연주가 있었다. 그의 생일인 9월 24일에 열린 특별 콘서트에서는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이 피아노 협주곡과 ''Sinfonia Elegiaca''를 연주했다.[5][8] 런던 킹스 플레이스에서 11월 30일에 열린 파누프니크 데이에는 브로드스키 콰르텟이 출연했다.[9] 11월에는 상파울루 주립 교향악단이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의 지휘로 ''Tragic Overture''를 두 번 연주했다.[10] 또한 2014년, 독일 음반사 클래식 프로덕션 오스나브뤼크는 루카스 보로비츠가 지휘한 파누프니크의 교향곡 8권 전집 발매를 완료했다.[11] 2014년에는 폴란드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UK가 트위크넘에 있는 그의 집에 명판을 설치했다.[12]

파누프니크 사후, 젊은 작곡가 육성을 목적으로 "국제 안제이 파누프니크 작곡 콩쿠르"가 네 차례 개최되었으며, 아가타 즈벨, 기영 정, 도미니크 칼스키, 가브리엘 팔레옹, 아타나시아 차누, 야쿠프 살루아스 등 개성파 작곡가들을 이 콩쿠르를 통해 배출했다.

참조

[1] 웹사이트 Andrzej Panufnik https://culture.pl/e[...] 2024-06-30
[2] 웹사이트 Andrzej Panufnik https://britishmusic[...] 2024-06-30
[3] 문서 Panufnik, 1987
[4] 문서 Jacobson, 1996
[5] 웹사이트 Birmingham Symphony Hall concert celebrates the life of former CBSO conductor http://www.birmingha[...] 2014-09-08
[6] 서적 London Cemeteries: An Illustrated Guide and Gazetteer The History Press
[7] 웹사이트 Andrzej Panufnik https://culture.pl/e[...] culture.pl 2013-08-23
[8] 뉴스 Review: Panufnik Centenary Concert, CBSO at Symphony Hall http://www.birmingha[...] 2014-11-03
[9] 웹사이트 Panufnik 100: A Family Celebration https://web.archive.[...] Kings Place 2015-09-25
[10] 웹사이트 Panufnik centenary celebrated in 2014 http://www.boosey.co[...] Boosey & Hawkes 2014-11-03
[11] 웹사이트 Panufnik: Symphonic Works Volume 8 http://www.prestocla[...] prestoclassical.co.uk
[12] 웹사이트 Unveiling of a plaque commemorating the Centenary of Sir Andrzej Panufnik - September 2014 http://www.polishher[...] 2014
[13] 웹사이트 尾高忠明(指揮)に聞く 3人の作曲家、 尾高尚忠、ルトスワフスキ、パヌフニクに寄せる思い https://web.archive.[...] NHK교향악단 2023-05-19
[14] 서적 クラシック音楽作品名辞典 삼省堂 1996-12
[15] 웹인용 Birmingham Symphony Hall concert celebrates the life of former CBSO conductor http://www.birmingha[...] 2014-09-08
[16] 서적 London Cemeteries: An Illustrated Guide and Gazetteer https://archive.org/[...] The Histor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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